아쉬움이 남는다
p187.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서점을 간다. ...(중략)...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와닿다는 제목들이 때때로 달라진다. ...(중략)... 그럴 때면, 어디선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내 이야기를 써놓은 것 같은 글과 노래, 영화가 나를 어르고 달래준다. 진심을 다 해 적어둔 몇 가지의 다짐과 느낀 점이, 직접 쓴 멜로디와 한 글자 한글자 적어내린 가사가, 그들이 연기로 보여주는 하나의 행동들이 나를 위로해준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런 위로가 되고 싶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읽고 나서 아쉬움이 들었다.
왜냐하면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책을 대여했던 때는 약 한 달 전이었다. 제목에 이끌려 대여했었고, 당시 인간관계에 지쳤던 내 마음을 누군가 글로서 명세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이 책에 눈길이 가게 만들었다. 심란한 마음을 추스른 후 비로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왜냐하면, 나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작가님께서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그 사고 과정을 발자취 따라가듯 엿볼 수 있기를 바랐다. 또는 '죽음'과 관련 있지 않더라도, 작가님께서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했는지 그 경험을 소상히 알려주시며 독자에게도 위로를 건네는 것. 내가 기대했던 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죽음에 관한 사고나 어떤 경험을 공유받기 어렵다고 느꼈다.
사람 중에는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사람도 있고, 말을 잘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건 내가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 아니어도, 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위로가 무엇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 너무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아, 말을 조금 못 하더라도 괜찮아 등등...
물론 위로라는 게 그렇다. 꼭 특별한 말이어야만 위로가 되는 게 아니니까. 즉, 사람들이 하는 위로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는 위로나 작가님이 하는 위로나 그 말 자체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평범한 말들이 어떻게 위로가 되는 걸까? 개인적으로 그 말에 진정성이 담겼을 때라 생각한다. 내가 엄청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내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고, 정말 그 친구가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이 위로가 되는 게 아닐까?
작가님의 위로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작가님과 독자들은 생면부지의 관계이고, 독자들 각각이 처한 상황이 다른데 어떻게 그 말이 쉽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서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작가님의 위로가 설령 와닿지 않았더라도, 아... 작가님은 이 상황에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극복해 내셨구나. 삶에는 이런 방식도 있구나 하며 그 경험에서 진정성을 엿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아쉬움을 느꼈다. 과정이 빠졌다고 느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이 책에 '특별함'을 원했던 건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갸우뚱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모순'이라 말하면 조금 그렇고, 음... 내가 부족한 탓에 작가님의 생각을 다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 느낀다.
p23.
시간이 흘러 간혹 그때의 내 모습. 그러니까 그때의 내가 썼던 글, 남아있는 사진과 기록된 영상,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맞닥뜨릴 땐 언제나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움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참 어리고 촌스러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p180.
다른 사람들보다 들려져 있는 코. 그 때문이었을까. '돼지코'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학창 시절 몸무게도 많이 나갔고. 별명 때문에 누군가의 앞에 서서 내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놀림받는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 말문이 막혀 눈물이 나오는 날들도 여럿 있었다. 그 시절 '소심하다'와 비슷한 단어들은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나를 꾸며주기 위해 탄생한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 (중략)... 모두 나다. 나를 이루고 있는 내 모습이다. 한때는 다른 사람과 달라서 싫어했던 내 모습들도 있고, 적당힌 평균적인 모습이라 벗어나고 싶었던 내 모습도 있다. 아무렴,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었지만.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내 모습을 싫어하니 들었던 생각들이었다.
과거의 나도 '나'이고, 그런 나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나도 '나'이다. 이러한 나의 여러 단면들을 인정하는 모습,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신 것으로 느낀다. 그런데 정작 책의 초반부에는 작가님 본인의 과거 모습이 참 어리고, 촌스러웠다 느낀 경험을 공유해 주셨다. 작가님께서도 아직 나 스스로를 다 인정하지 못하시는 거구나 생각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p105.
죽음에 대하여 기억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당신들 곁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인데.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귀하게 지어준, 값진 의미 부여를 한 내 이름 세 글자를 잘 쓰고 싶다. 이름대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매일 타는 버스에서는 기사님께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야겠다. 커피를 내려주는 직원 분께 고맙다고 마음을 전해야겠다.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의 에피소드 내용이다. 과정이 빠졌다고 가장 크게 느꼈던 내용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작가님께서 저러한 다짐을 가지기까지의 서사가 잘 와닿지 않았으니까. 작가님께서 저렇게 다짐하셨다면, 그 결정은 정말 값지고 존중해야 한다고 느낀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어떻게' 저런 다짐을 하시게 되었는지는 그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마치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 - 결'이 된 느낌이라까. 그래서 응...? 갑자기 저렇게 된다고? 위로보다는 갸우뚱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됐다.
p117.
SNS에 올리는 글들은 바로바로 피드백이 온다. 이번에도 어떤 댓글로 피드백을 받았다. 내가 가장 힘든 날, 나에게 위로하는 마음으로 썼던 글. 내가 겪은 힘듦과 비슷한 모습의 힘듦을 마주하게 됐을 때 조금의 위로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에 썼던 글. 신념이나 정치적 사상, 종교, 사회적 이슈 그 어떤 것도 언급되거나 포함된 적이 없는 글. 그러니까 강한 주장의 성격을 담아낸 글도 아닐 뿐더러, 내가 정말로 힘들 때 나를 위로하려 쓴 글.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었다. 하지만 댓글을 단 사람은 내 의도와 다르게 비난과 힐난이 담긴 글을 내게 던졌다. 그 글을 본 순간, 내 기분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상해버렸다.
"억지 위로, 공감도 이젠 질리지 않나요? 이런 글들 그만 올려주세요. 오글거려요."
이 짧은 문장을 보고 밀려오는, 울컥하기도 욱하기도 한 이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까. 좋은 마음이 좋은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고 무시로 돌아올 때 느끼는 허무함.
p123.
인정의 욕구가 그 어느 욕구보다 상위에 속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에서 개개인이 지니고 있어야 할 자존감은 무너지거나 떨어지기 쉽다.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바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라는 꽉 막힌 프레임 속에 갇혀, 타인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p125.
그러니 집단 속에서 개인이 살아낼 유일한 방법은 타인의 색에 물들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 역시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 또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것이다
작가님의 진심을 몰라주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자는 작가님의 말. 어떤 면에서는 상충하는 상황이 아닐까.
p146.
좋은 사람이 되려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 되려고, 이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손에 쥐고 있는 모래를 꽉 쥐게 되면, 쥐게 되는 힘만큼 흘러내리게 된다. 애써 노력한 흔적들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힘을 주지 않고 놓아 버리면 모래는 놓아버린 만큼 손 바깥으로 흘러 내려간다. 나는 그저 편안히 손에 쥐어진 모래를 감싸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굳이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되었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어떤 모습이건,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모래알처럼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공감하지 못했던 말이다. 그래서 저 문구를 따로 메모해 뒀었다. 왜냐하면, 너무 듣기 좋은 말만 해주시는 거라 느꼈기 때문에. 타인을 너무 의식하지 말자는 말에는 나 역시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더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을 수는 있어도 화살표를 따라 나아가는 것 그 자체까지 멈춰서는 건 다른 문제니까. 따라서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노력하는 방향이 좋지 않을까? 따라서 '굳이'라는 표현과 함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며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안주'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너무 듣기 좋은 말만 해주신 것으로 느꼈고.
p152.
하물며 책은 오죽할까. 기획한 책과 직접 쓴 책들은 적게도 수천 명, 많게는 수십만 명이 잃게 된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내내 감사한 마음이지만, 그래서 언제나 무겁다. 무작정 좋은 말들을 해드려야 하는 건지, 대책 없는 위로를 드려야 하는 건지, 긍정적인 생각들을 드려야 하는 건지, 내 생각을 그대로 표현해야 하는 건지.
솔직하게 말하면, 위 문장을 읽고 기분이 조금 묘했다. '무작정 좋은 말과 대책 없는 위로', 이 말들과 함께 어떻게 위로를 건넬지 고민하셨다는 건, 작가님께서 이 책을 통해 건네주고 계신 위로에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 거니까. 물론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p167.
밑줄 하나를 긋고 그 안에 글자를 채워 넣어보자. 밑줄을 먼저 긋고 글자를 쓰려면 밑줄 안에 얽매이게 되어 원하는 글자 크기를, 또 원하는 글자 수를 채우지 못할 확률이 커지게 된다. 반대로 글자를 먼저 쓰고 밑줄을 긋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크기의 글자를 또 내가 원하는 글자 수에 맞춰서 밑줄 안에 쓸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일들을 밑줄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궁무진히 해낼 수 있는 당신이니까.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면 싶다.
스스로를 가두지 말자. 특별한 말은 아니다. 그래서 저 문구를 읽으며 작가님께서 본인의 경험을 같이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